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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2.0] #1. 사표


2012년 2월,
7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정확히는 사직 의사를 밝혔다.)
2년에 걸쳐 무려 여섯 군데 이상의 회사를 전전하다 겨우 정착해 
30대 초반까지의 대부분을 보냈던 곳.
한 때는 매일 매일이 너무나 즐겁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곳이다.

항상 ‘통쾌’한 것이기만 했던 사표가 이렇게 씁쓸하고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전에는 미처 몰랐다.
분노와 원망, 그 이외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먼저 내지는 않으리라고, 그러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것.
하지만 결국 먼저 무릎을 꿇은 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악마 같은 존재들과 이 부조리한 환경이 아니라
나였다.

내 인생은 모든 면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나의 자리는 애매했고, 정당한 평가나 기회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에 걸친 부당한 평가는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기회가 있다 한들 쏟을 수 있는 열정[1]이 남아있지 않았다.
회사에 있는 시간 내내 나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이 생각은 기생충이 되어 끊임없이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회사에서 진행 중인 ‘정리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대상으로 선정되고 나면 패키지를 챙겨서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반드시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기에 일종의 모험이기는 했지만, 시도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까지만 참으면 된다,
그러면 부당한 평가, 미친 듯이 우리를 괴롭히는 사이코패스 상사들, 지긋지긋한 이 모든 것과 안녕이다.’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고개를 들 때마다, 이 생각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쉽게 진행되지 못한 채 거듭 지연되었다.

돌파구에 대한 갈망은 나도 모르게 남자친구에게로 향했다.
때 마침 당시의 남자친구는 다니던 회사의 도쿄 지사로 적을 옮겼고,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쿄로 살러 가야 한다면 나름 보기 좋은 이유로,
아무도 모르게 나의 치부를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던 나는, 남자친구를 여러 모로 들볶았(던 것 같)다.
남자친구는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일을 하며 성공적인 연봉 협상을 통해 많은 돈을 받고 회사를 옮기는데 나는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도 나를 주눅들게 했다.

고통스런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어디론가 떠나다 보니, 돈을 모으려는 계획도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년 동안 저축했어야 하는 금액의 절반 이상을 도피성 여행에 쏟아 부은 나머지,
마지막 1년은 사실상 다닌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매번 돌아오기 전날에 느낀 그 괴로움은 또 어떠했던가.
여행을 떠나서 좋을 때는 떠나는 날 딱 하루뿐이었다.
5일짜리 여행을 가면 3일째 되는 날부터는 돌아갈 생각에 괴로워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날은 꼭 울면서 끝이 났다.

과감히 정리해고 보상금에 대한 기대를 접자, 이제 남은 선택은 이직뿐이었다.
하지만 경력에 비해 경험이나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실제 실력과 관계없이 잘도 옮겨 가는 속 빈 강정-人材를 가장한 人災- 같은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나는 그 만한 배포가 있는 사람이 못 된다.
필사적인 마음으로 몇 군데 회사로의 이직을 시도했지만,
수채 구멍에 며칠이나 늘어져있던 시금치 줄기 같은 상태로는 내가 가진 색깔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몇 번의 면접은 서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럴 때마다 내가 부족한 존재라는 인식에 강화가 일어나 마음이 더 괴로워졌다.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대로 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뭘 해야 할 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멀쩡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속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썩어 있었다.
무너지는 자존감과 함께 나는 끝없이 침잠했고, 죽음만이 이 모든 괴로움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나를 주위 사람들은 위태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엄마와 남자친구는 심각하게 정신과의 도움을 받을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뭔가 근본적인 것이 심하게 잘못되어 있었다.

회사를 그만 둬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장기 남미 여행을 위해 모아 둔 얼마간의 돈이 있었지만, 평생 뜯어먹고 살 수 있을 만한 액수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만둔다면 언제가 좋을까는 또 다른 문제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정말 굳게 결심했다고 생각했던 결정도 다음 날이면 뒤집개 앞에서 힘없이 배를 보이는 부침개 꼴이 되기 일쑤였다.
이렇게 뒤집고 뒤집고 또 뒤집기를 수십, 수백, 수천 번…
끝내 나를 무릎 꿇린 것은 ‘일단 살고 봐야겠다’ 는 생각이었다.

일단 살자. 다른 건 그 다음에 다시 생각하자.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어학을 좋아했지만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으니 쉬면서 그간 존경했던 선생님한테 영어 수업이나 듣자.
이게 계획의 전부였다. (이런 걸 계획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이 사건이 내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지, 그 땐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인생의 1막에 내는 사표였다는 것을,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던 날들에 내는 사표였다는 것을,
새롭게 펼쳐질 인생 2막에 던지는 출사표였다는 것을,

그 땐 정말 몰랐다.

[1] *주체에 따른 열정의 정의
나: 맡고 있는 일에 대한 기쁨, 설레임, 애인처럼 자꾸 생각나는 기분
회사: 일이 있든지 없든지 무조건 야근하는 것. 저녁 먹고 늦게 다시 돌아와서 남은 인원을 체크하는 상사의시험에 들지 않도록 자리를 지키는 행위.



… 다음 편에 계속

* Life 2.0은 윤앤리퍼블리싱 운영자인 “리(lee)”의 경험을 공유하는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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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2.0] Prologue

LIFE 2.0


2012년 4월을 기점으로 내 인생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
나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래서 감히 그것을 LIFE 2.0이라 부르기로 했다.

목적

LIFE 2.0은 이렇게 큰 변화가 있기까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또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공유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아직 어떤 결론이 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글을 쓰는 이유는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에서다.

누구나 자유롭게 댓글을 통해 고민과 즐거움을 나누는,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나에게는 최고의 보상이 될 것 같다.

일러두기

나는 비교적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매우 평범한 사람이며, 따라서 내 얘기가 극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한 다른 많은 사례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Life 2.0은 윤앤리퍼블리싱 운영자인 “리(lee)”의 경험을 공유하는 에세이입니다.